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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그 너머/세로로 긴 나라들

세로로 긴 나라들의 군사 전략과 국방의 지리학

by 어웨어12 2025. 4. 8.

– 지형이 만든 방어선, 길이가 만든 전략

군사 전략은 단지 병력의 수나 무기 체계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국토의 생김새, 주변국과의 국경선, 자연 지형, 교통망, 기후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전략적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국토가 세로로 긴 국가들, 즉 북과 남의 거리가 멀고 국경선이 길게 뻗은 나라들은
방어선 유지, 병력 이동, 통신망 통합, 재해 대응 같은 영역에서 다른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칠레, 노르웨이, 베트남은 모두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국가로, 서로 다른 대륙과 정치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군사 전략을 수립해왔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 세 나라가 세로형 국토 구조라는 제약 속에서 어떻게 국방을 설계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방어 전략을 구축해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 세로형 국토의 군사 전략상 공통 과제

세로로 긴 국토는 가장 먼저 국경선의 길이 문제를 발생시킨다. 국가의 가장자리, 특히 외교적으로 민감한 지역과의 국경은 항상 감시와 방어가 필요한 장소지만, 국경선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감시 자원의 분산과 인력 부족 문제가 나타난다. 또한 장거리 병력 이동 역시 세로형 국토가 가진 구조적 약점 중 하나다. 중앙에서 병력을 보냈을 때 국경 지역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를 위한 병참선 유지 비용과 작전 효율성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지형이 다양한 것도 또 하나의 복합적 도전 과제다. 한 나라 안에 산악, 해안, 평야, 밀림 등 다양한 지형이 공존할 경우, 각 지역마다 다른 전술, 병력 구성, 장비 체계를 준비해야 하며, 이로 인해 작전의 표준화가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통신과 지휘 체계의 일원화다. 세로형 국토는 통신 인프라가 끊기거나 분산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에, 지역 간 정보 공유와 위기 상황에서의 지휘 통합이 핵심적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 세 나라 모두 ‘집중 방어’, ‘전략적 병력 분산’, ‘지형에 기반한 작전 설계’라는 전략적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오고 있다.

 

 

2. 칠레 – 안데스를 활용한 산악 방어 전략

칠레는 남북 길이가 약 4,300km에 달하며, 국경선의 대부분이 안데스산맥과 맞닿아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나라다. 이는 곧, 칠레가 자연 지형을 천연 요새처럼 활용할 수 있는 군사 전략적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부 지역은 페루, 볼리비아와 인접한 외교적으로 민감한 국경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군사 전략 거점과 병력 배치가 집중되어 있다. 칠레군은 이곳에서 기계화 부대보다는 산악 병과 경량 보병 중심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복잡한 산악 환경에서의 기동성과 생존성을 강조한다. 중앙부, 특히 수도 산티아고 주변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내부 방어를 위한 병참과 지휘 통합 체계가 집중되어 있다. 반면, 남부 지역은 인구 밀도도 낮고 환경도 험하기 때문에 군사적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이는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리적 구조와, 해당 지역에서의 전면적 충돌 가능성의 낮음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해안선이 길게 펼쳐진 칠레의 경우, 해군 전략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주요 항만과 물류 라인을 방어하는 임무가 중요하다. 해양 재해에 대비한 민군 협력 훈련도 강화되고 있으며, 지진, 쓰나미 등 재해 대응 체계와 국방 체계의 통합도 하나의 전략 과제로 자리 잡고 있다.

 

 

3. 노르웨이 – 북극과 해안 방어의 이중 전략

노르웨이는 국토 길이는 약 1,750km로 칠레보다는 짧지만, 피오르드 지형으로 인해 해안선 길이만 수만 km에 달할 정도로 복잡한 형태를 갖고 있다. 게다가 북쪽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북극권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 전략에 있어 국내적 방어뿐 아니라 국제적 균형 전략까지 고려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노르웨이의 군사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북극권 방어를 위한 북부 병력의 고정 주둔이다. 이 지역에는 혹한기 작전에 대비한 병력과 장비가 집중 배치되어 있으며, 지속적인 극지 작전 훈련을 통해 기후 적응력을 강화하고 있다. 기후에 따른 전투력 저하를 막기 위해 극한 기후 대응 장비와 병참 시스템의 현대화도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두 번째는 해양 중심 방어 전략이다. 노르웨이는 나토(NATO) 회원국으로서 연합 방어 체계의 일환으로 미국 및 유럽 주요 국가들과의 합동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해상초계기, 잠수함, 고정형 및 이동식 방공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피오르 지형의 특성상 잠수함 운용의 효율성이 높고, 지형 자체가 외부 침입을 어렵게 만들어 지형 기반의 방어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단지 국방 차원을 넘어 국제 안보 질서에서 전략 요충지로 인식되며, 이는 이들의 방어 전략에 있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세로로 긴 나라들의 군사 전략과 국방의 지리학


 

 

4. 베트남 – 방어와 통합을 동시에 고려하는 전략

 

베트남은 전쟁의 기억이 깊게 새겨진 나라로, 세로형 국토 구조와 함께 남북 간의 정치적, 군사적 균형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현재의 국방 전략은 국경 방어와 국가 내부 연결성 유지, 그리고 해양 방어 능력 강화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중국과의 국경선이 긴장을 유발하는 구간이다. 이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베트남은 국경경비대(Border Guard) 체계를 통해 복잡한 산악지대를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서부 지역에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선을 따라 작전 기지를 분산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국경 방어 전략은 소규모 분산 전투와 민군 협조 전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 전쟁 경험에서 배운 게릴라 전술과 지형 활용 전술이 여전히 기본 전략에 녹아 있다. 또한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축을 따라 병참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북의 전략 요충지를 빠르게 연결하는 내부 이동 네트워크도 군사적 자산으로 간주된다. 이는 단지 병력 이동뿐 아니라, 국가 위기 대응 체계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격화되면서, 해군력 강화와 해양 경비 능력 증강이 베트남 국방 전략의 주요 과제로 부상했다. 특히 다수의 섬과 암초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해상 물류와 어업권을 보호하기 위한 해상 감시 체계, 연안 방어 시스템, 해군기지 현대화 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방은 지형과 함께 설계  지형을 아는 것이 곧 전략이 된다

세로형 국토는 전통적으로 군사 방어에 불리한 형태로 인식되곤 했다. 국경선은 길고, 병력 이동은 어렵고, 기후와 지형이 다양하여 통합적인 작전 수립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레, 노르웨이, 베트남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자연 지형을 방어 자산으로 활용하고, 지리적 약점을 전략적 이점으로 바꾸는 방식의 군사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칠레는 안데스 산맥을 병참선이 아닌 방어선으로 전환시켰고, 노르웨이는 극지 작전 능력을 기반으로 NATO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베트남은 지형 활용 전술과 역사적 경험을 결합해 내부와 외부 모두를 견제할 수 있는 군사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이 세 나라의 사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국토의 형태는 단점이 아니라, 전략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지형을 이해하고, 기후에 대응하며, 공간을 통제하는 능력이 그 어떤 첨단 무기보다도 더 지속 가능하고 효율적인 국방 전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