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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그 너머/세로로 긴 나라들

세로로 긴 나라들의 문화 다양성과 정치 통합 과제

by 어웨어12 2025. 4. 8.

– 길게 나뉜 땅 위에서 하나의 국가를 유지한다는 것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지리적 조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특히 국토가 세로로 길게 뻗은 국가들은 물리적인 거리와 기후, 이웃 국가의 다양성 등으로 인해 지역별로 서로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 정치 성향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풍요로운 정체성과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행정의 단절, 정치적 분열, 정체성의 이질화라는 도전도 함께 가져온다. ‘하나의 국가’로 기능하기 위해선 물리적 연결만큼이나 정신적, 제도적 통합이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세로형 국토를 가진 대표 국가인 칠레, 노르웨이, 베트남의 사례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정치적 통합 문제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국가 내부 통합의 본질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다양한 지리, 다양한 문화 – 세로형 국토가 만드는 문화의 층위

국토가 세로로 길다는 것은 곧 다양한 위도와 기후, 그리고 국경을 가진다는 의미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방식, 전통 문화, 언어, 종교 등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칠레에서는 북부 지역에 원주민계 인구가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은 안데스 문명의 영향을 받은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반면, 남부 지역은 스페인계 유럽 이민자 후손이 주류를 이루며, 농업과 해양 중심의 생활 양식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차이는 지역 간 생활양식뿐 아니라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도 이어질 수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북부에 사는 ‘사미족(Sámi)’은 완전히 독립된 언어와 문화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천 년간 유럽 북극권에서 살아온 이들은 순록 유목, 독자적 예술 전통, 종교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노르웨이의 공식적 국민임에도 문화적으로는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베트남은 국토가 길게 뻗은 만큼, 북부와 남부 간의 문화 차이가 매우 뚜렷하다. 북부는 유교적 전통과 공산주의 정치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고, 남부는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을 받은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해 있다. 언어 억양, 음식, 관혼상제, 심지어 정치적 견해까지 다르게 나타나며, 이는 과거 남북 분단의 역사적 경험과도 맞물려 여전히 민감한 정체성 이슈로 남아 있다.

 

 

2. 정치적 통합 – 중앙집권과 지역 자치 사이의 긴장

문화적 다양성이 뚜렷할수록 정치적 통합은 더 복잡해진다. 이는 ‘중앙집권적 체계’가 과연 모든 지역의 필요와 요구를 충분히 담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칠레는 전통적으로 수도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중형 행정 구조를 운영해왔다. 행정, 경제, 교육, 미디어 자원이 수도에 몰리면서, 지방의 소외감이 지속적으로 커졌고, 이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9년 대규모 시위 이후, 칠레에서는 사회 불평등과 지역 격차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지방 분권을 포함한 헌법 개정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반면, 노르웨이는 지방 분권화에 있어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나라다. 북부 사미족이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사미 의회(Sámediggi)를 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 자치기구는 교육, 문화, 환경 문제 등에 대해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행정 권한이 지역별로 적절히 분산되어 있어, 국가 전체가 하나의 중앙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균형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베트남은 여전히 강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북부 하노이를 중심으로 행정과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며, 남부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정치적 발언권이나 자율성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북 분단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남부는 중앙에 대한 견제 심리 ‘서울과 부산’ 이상의 정서적 분리감을 안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공공 정책이나 정치 선호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3. 행정의 거리 – 멀리 떨어진 지역은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세로형 국토에서는 지리적 거리 자체가 행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북단과 남단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면, 단순한 정보 전달뿐 아니라 재난 대응, 복지 서비스, 인프라 건설까지 모든 분야에서 시간과 자원이 더 많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세 나라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칠레는 남북 길이가 너무 길다 보니, 행정 커버리지가 떨어지는 지역이 존재하며, 기후와 지형까지 다양해 동일한 정책을 적용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칠레 정부는 지역 개발청을 설립하고 분산형 행정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으며, 지방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구조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이러한 거리 문제를 지역 권한 분산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지역마다 자율적인 행정 기구가 존재하고,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현지 행정 조직이 지역 주민의 특성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이를 통해 북부 극지방처럼 접근이 어려운 지역에서도 비교적 높은 행정 만족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중앙과 지방 간의 거리 문제 외에도 행정 정보의 비대칭성 지역별 인프라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남북 공동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예컨대 남북 고속철 건설, 항만 연결 프로젝트 등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농촌 지역은 행정 소외 지대로 남아 있으며, 지역별 예산 배분의 형평성 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4. 교육, 미디어, 상징의 역할: ‘하나의 국민’ 만들기

정신적 통합은 단지 제도나 정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민들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공통된 상징, 이야기,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세로형 국토 국가들은 교육, 미디어, 상징을 통해 국민 통합을 시도한다. 공교육은 대표적인 수단이다. 전국 공통의 교과서, 표준어 교육, 통일된 역사 서술은 각기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국가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칠레와 베트남은 모두 이를 기반으로 교육 과정 통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노르웨이 역시 표준 노르웨이어 교육과 함께 사미어를 병행 교육하는 이중 언어 모델을 통해 통합성과 다양성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미디어 역시 강력한 통합 도구다. 국영 방송, 국가 주도의 뉴스 네트워크는 동일한 정보를 전국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지역 간 인식의 차이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 베트남에서는 국영 방송과 신문이 정부 입장을 통일적으로 전달하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상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국민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스포츠나 국경일 같은 대중적 상징도 통합의 힘을 발휘한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은 북부와 남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모두가 열렬히 응원하는 존재로, 정치와 경제의 분열을 초월한 정체성 통합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노르웨이의 경우, 국경일인 5월 17일에는 사미족을 포함한 전 국민이 함께 행진에 참여하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임’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화 통합의 장으로 기능한다.

 


 

세로로 긴 나라들의 문화 다양성과 정치 통합 과제
베트남 축구 거리 응원


 

 

‘형태’가 통합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세로형 국토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나눌 수 있다. 기후도, 문화도, 사람들의 생활 양식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행정의 거리, 정치적 불균형, 문화적 이질감이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국가는 오히려 더 풍부하고 유연한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다. 칠레는 분권 개헌을 통해 지역의 목소리를 포용하려 하고 있으며, 노르웨이는 자치와 상징을 조화롭게 운영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은 아직도 통합의 과정을 겪고 있지만, 공통의 교육과 상징을 통해 점진적인 정체성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국토의 형태는 분리를 만들 수 있지만, 교육, 언어, 미디어, 축제, 공동의 이야기는 다시 국민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국가’란 물리적으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